맨드라미 - 3

드믈게 자라난 피의 목을 빗목 뽑듯 뽑아내고, 물빠짐이 좋도록 벼포기를 길 게 한 줄 뽑아내 똘을

친 뒤 여기저기 설치한 늑대거미의 '밥줄'을 낫으로 걷어내 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늘이 장날임을 떠올렸다. 정작 사는 물건이라곤 없

지만 장마당을 한 바퀴 도는 구경은 빠뜨리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 됐다. 일

주일전 어느 모임에 참석해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과음하고,

다음 날은 꼬박 집안에서 투병했었다. 그 뒤로 술을 걸러왔으니 모처럼 난

장에서 순대국에 막걸리를 한 되 마시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집집마다 마당엔 오년만의 풍작이라는 도토리를 주워다 말리는 풍경이다. 그에 비해 흉작인 고추

는 덜 널린 셈이다. 어느덧 등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방바닥에 누워, 길깃집이라 아직 걷어내지 않

은 문발을 통해 녹슨 양철지붕선 밑으로 펼쳐진 깊은 하늘색을 들이키고 있노라니 검은색 다이얼

전화기가 뭉툭하게 울었다.

뜻밖에도 아내였다. 이번 주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러 오겠단다. 이런저런 어려움과 갈등으로

사실상 별거를 하듯 혼자 이곳에 내려와 있는 동안, 아내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아내가

온단다. 얼마전 부터 전화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조금씩 회복해 온 노력의 결과리라. 어디선가 부

부는 살 섞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살맛 모르고 지내 온 지난 날들에 쌓였던

안타까움이 한 꺼풀 걷히는 듯 했다.

책장안 동전통에 넣어 둔 큐빅알 박은 결혼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워 봤다. 그동안 농사일로 손

가락마디가 굵어진 탓일까 들어가지 않는다. 농사일엔 반지가 불편하고 시계 조차도 손목에 차는

게 거추장스러 혁대에 달고 다니는 습관이지만, 이제 흙 속에 손을 담그는

일철도 지났으니 반지를 늘여서라도 끼고 지내야 겠다. 아내에게 또한 벗어

놓은 반지를 끼워 줘야지. 비록 반지알은 모조품 이었지만 앞으로의 인생은

좀 더 서로에게 진정을 다하며 살아가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툭! 벌어진 밤송이에서 떨어진 밤알이 구르다 멈춘 울타리 밑에 유난히 붉은 맨드라미의 닭벼슬이

노란 가을 햇살을 흠씬 받아내고 있다. ▦ -1998

♧ 후기를 대신하여 -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 한다지만, 나는 작가도 아니고, 이 글은 작품도 아니다.

그러니, 몇 마디 덧붙인다 하여 그리 흠 될 일은 아니리라.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한 때 회원으로 가입해 있던, 철원문학회 1998년 문집에 싣기 위함이었다.

그 해 1월, 더이상 도시 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20여년만에 고향 무네미로 돌아올 즈음

나는 문학에 대해 새로운 의미-가치부여를 하고 있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다. 시를 쓰기엔, 나는 삶에 대한 열정과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거의 변함이 없다.

소설을 쓰고자 했으나, 습작 <맨드라미>는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 처럼, 너무 나의 현실에 가깝게

그려졌다. 결국, 실패한 습작이 됐다.

하지만, <맨드라미>는 이후 내 삶의 모습을 예언적으로 그려 놓은 부분도 있다.

일상에서는 다른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일까, 글을 통해서라도 많은 이야기

를 나누고 싶단 생각을 갖고 있다. 시詩적인 은유와 함축도 좋지만, 소설식 서술과 서사 방식을

통한 이야기 나눔이 내겐 필요한 것 같다. 그나마도, 지금은 거의 잊고 지내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