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 2

마을회관 스피커에서 꽤나 세월이 지난 대중가요 전주곡이 흐르다 멈춘 뒤 "아 - 아 - 리에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각 반 반장님과 새마을 지도자 그리고 개발위원님들을 모시고 회의

를 갖고자 하오니 이 방송을 들으시는 대로···" 연거푸 세 번 리장의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밥을 안

치고 반찬생각을 하다 며칠전 따 놓은 제법 큰 둥근 호박을 오가리 켜듯 깎아 내서는 삶았다.

그것에 참기름과 밥을 비비는 것으로 아침을 해결할 생각이다.

지난 일월 혼자 이곳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날이 갈 수록 가사일엔 싫증이 나기 시작했

다. 귀향하기 전 몇년간 객지에서 공사장 막노동이며 도급제 택시운전을 일삼았던 것에 비하면 농

사짓는 일은 정말 살맛나는 즐거움 을 주고 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농토가 있어 가능

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를 상상해 볼라치면 참담함을

떠올리곤 한다. 이십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순전히 각박한 현실에 따른 궁여지책 만은 아

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었음을 생활속에 자주 느끼곤 한다.

벼가 고개를 숙이기 전 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동네 어귀의 논을 한 바퀴 돌았다. 논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논둑에 쥐구멍이 뚫리거나 병충해나 웃자란 돌피가 무성하지 않은지를 살펴 보는 것으

로 생업이자 생활인 하루 농사(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아침마다 '문안' 드리지 않

아도 됐다.

단지 지난 보름여 동안 오전 오후 서너 시간씩 밀계 논으로 나가 때 늦은

피사리를 하느 라 좀 어려움을 겪었다. 봄 부터 여름까지 두벌 김을 매고 난

뒤로, 유난히 길 고 비가 많았던 장마기간 동안 논에 들어가지 않았더니 논

은 온통 새까맣게 고개 숙인 돌피 이삭으로 넘실거렸다. 처음 짓는 농사일

에서 느끼게 된 것은, 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이삭이 죽는다던가 논에

피가 많을 때 창피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체면 때문이 아니

라, 농부로서의 삶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내 비치는 것이란 사실 앞에 갖게 되는 부끄러

움 이었다.

벼농사 육천여평 말고는 다른 작물을 경작하지 않기에 처음 짓는 농사지만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

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비교적 잘 작응하고 정착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당에서 아이들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려 밖을 '관찰'하기 위해 창호지 문 에 붙인 작은 유리를

통해 내다보니,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초등학생 서넛이 밤나무 아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혹 밤

톨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주으려는 게 다. 이웃 방씨댁 밤과는 달리 늦밤인지라 아람이 번 것은 어

쩌다 보일 뿐 이었 다. 어쨌거나 아이들의 두리번거리는 발걸음에서 어떤 활기를 전해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을 먹고, 장마뒤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고 있는 운장리 논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십리가 좀

더 되는 거리의 논을 오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오토바이를 끌어 내 시동을 걸었다. 포르르

릉! - 스타팅 킥을 밟자 단번에 걸린 시동 만큼이나 기분 좋은 하늘엔 이미 안개는 모두 걷히고 선

명한 구름들이 느린 걸음을 가고 있었다. 속도계의 바늘이 오십 길로미터를 넘어서지 않도록 경제

적으로 달려 도착한 운장리벌 논들엔 노랗게 익어가는 벼들이 좌 또는 우로 봣! 상태로 목을 늘이

고, 여름내 이곳 논배미들을 옮겨 다니며 먹이를 찾아 온 백로 두 마리가 하

얗게 날고 있었다.

비료가 지나친 탓 이었을까, 문고병이며 목도열로 이파리와 이삭이 까칠해

뵈는 밀계 논과는 달리 운장리 논은 벼가 좋아 보였다. 논둑을 한 바퀴 돌며